우리나라는 땅이 깊고 강수량이 많아 식물이 무성하고 자연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특별히 조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으로부터 각종 문화와 생활풍습에 크게 받았기 때문에 조경문화 또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조선 시대에 대동사강(大東史鋼) 제1권 단씨조선기(檀氏朝鮮紀)에 노을왕이 유(囿)를 조성하여 짐승을 키웠다는 정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불교와 한학이 들어온 4세기 이후부터 정원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대로부터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신선사상이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배경으로 송나라의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頤)가 설파한 애련설(愛蓮說)이었습니다. 20세기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정원문화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정원은 중국의 정원을 모방하여 궁궐과 이궁의 정원을 꾸몄지만 모방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정원 속에 자연석을 앉혀 보다 자연스러운 운치를 돌게 하는 수법 등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롭고 정교한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남의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미적 감각을 발휘해 보다 나은 것을 창조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 사조의 변화와 연계해서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지고 발달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 조경의 발달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고조선의 정원
고조선 시대에 대동사강(大東史鋼) 제1권 단씨조선기(檀氏朝鮮紀)에 ‘노을왕’이 ‘유(囿)’를 조성하여 짐승을 키웠다는 정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습니다.
‘유’는 담장을 없이 금수를 키우는 자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동서양을 가릴 것이 없이 정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거의 모두가 수렵지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는 바로 수렵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렵지부터 알맞은 자리에 담장을 둘러치고 연못을 파 나무를 심고 금수를 키움으로써 정원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 ‘원’입니다.
따라서 ‘유’는 정원의 원시적인 형태입니다. 중국에서 ‘유’가 생겨난 연대는 대체로 ‘주나라’ 초기로 보고 있으며 기원전 7백 년경입니다. 그런데 ‘노을왕’이 ‘유’를 꾸몄다는 시기는 약 3천9백 년 전입니다. 즉, 주나라보다 1천 2백년 가량 앞서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정원의 꾸밈새에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에는 주로 중국의 정원기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2. 삼국시대의 정원
고구려는 427년(장수왕 15)부터 평양의 대성산성시대에 진주지(眞珠池)라는 못이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었는데, 한 변이 약 100m 되는 방지형의 못 안에 네 개의 섬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형태로 볼 때 부여에 있는 ‘궁남지’와 비슷합니다.
500년대에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안학궁(安鶴宮)’의 남궁 서쪽에는 자연스러운 연못과 축산으로 이루어진 정원이 있었습니다.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고 연못의 윤곽선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며 바닷가의 풍경을 본떠 만든 정원인 듯합니다.
634년 백제 무왕 때에 조성된 ‘궁남지’는 궁궐 남쪽에 방지형 연못을 파고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고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대부분 논으로 변하여 원형을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주위 지형의 기복 상태로 보아 자연형의 소위 곡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곡지는 중국정원의 전통적인 지당기법이며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도 고대 중국 정원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의 정원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정원기법 도입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통일신라의 정원
경주지방의 남산 기슭에는 800년대에 만든 ‘포석정’ 터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술잔을 띄우며 시를 읊고 놀기 위한 곡수도랑[曲水渠]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가 353년 3월 3일 ‘난정(蘭亭)’에서 친지들과 함께 놀았던 곡수 놀이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 꾸밈새는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하고도 정교한 곡선미가 돋보입니다.
통일신라시대인 600년에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경주의 임해전과 월지원(月池苑)은 연못의 윤곽선과 축산이 자연스러우며 3개의 섬이 있다는 면에서 고구려 ‘안학궁’ 남궁원(南宮苑)과 형태적인 면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해전과 월지는 고구려가 망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축조되었습니다. 삼국이 통일되었지만 백제의 유민들이 도처에서 봉기하여 국내 정세가 매우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신라는 그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서 고구려의 유민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임해전과 월지의 축조에 많은 고구려 기술자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수많은 치석이라는 형태를 낳게 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 시대에는 정원기법이 세련된 양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기법의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기법 정착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PART 2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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