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1392년의 약 500년간 한반도의 국가였던 고려시대의 조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숭불 정책과 유교, 풍수지리, 중앙집권적 국가였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으며 중국 송과 문화교류로 목판인쇄술과 고려청자가 발달하였습니다.
1. 궁궐정원
고려시대의 정궁인 만월대는 풍수지리 사상과 주계고기공기의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원리를 적용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
‘동지’는 만월대의 동쪽에 꾸며졌던 후원의 큰 연못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연못 주위에 학, 거위 등을 사육하고 귀령각이라는 누각이 물가에 있어서 경관을 감상하였다고 합니다. 왕과 신하의 위락공간을 위한 정원이라고 보입니다. 왜구들로부터 노획한 배를 띄워 임금이 보시도록 했다는 기록을 보면 규모가 꽤 컸던 것으로 생각되며 생김새는 곡지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제15대 숙종 4년에 궁 안에 꾸민 ‘화원’은 고려 후기에 모란꽃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사루’와 상춘정이라는 누각과 정자에서 상회연을 베풀고 꽃을 감상하고 시를 짓고 놀았다고 합니다.
‘화원’은 당나라 때 사람인 이적지의 망춘궁응제시 속에 「화원사망금병개」에 보이는 것처럼 궁궐 안 수많은 건물 사이에 꾸며 놓은 규모 작은 정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중국에서는 궁궐 후면에 규모 큰 후원을 꾸미는 한편 여러 전각에 의해 둘러 싸인 좁은 공간을 잘 살려 여러 개의 화원을 꾸며 왔으며 원나라 때부터 쓰여 온 북경의 자금성 안에는 ‘어화원’이라 불리는 화원을 비롯하여 세 개의 화원이 남아 있습니다. 화원은 몇 그루의 측백나무와 석가산 그리고 수많은 꽃나무, 초화류로 아름답게 꾸며서 ‘화원’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화원’은 숙종의 뒤를 이은 예종과 의종 때에 성황을 이룹니다. 의종은 고려사에 그를 ‘경조무인군치도’라고 평한 것처럼 성격이 대단히 경박하고 정치에 관심이 없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놀이에만 몰두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시켜 화려한 화원을 꾸미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2. 사찰 정원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의 대표 사찰은 청평사와 송광사가 있습니다.
강원도 춘천시의 ‘청평사’에 이자현이 꾸민 정원 ‘문수원 남지’는 자연을 그대로 살리면서 경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치석과 방지, 그리고 경관을 즐기기 위한 장소로서의 아정이 인위적으로 곁들여졌습니다. 문수원 남지는 영지라고도 불리는데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의 연못으로 부용봉에 있던 견성암이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문수원 남지의 특징은 치석기법입니다. ‘치석’은 우리나라에서 개발해 낸 정원기법의 하나입니다. 비등한 크기의 두 가지 이질적인 색채를 가진 암석이 쓰여 자연적인 운치가 결여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문수암’ 정원의 치석은 문수암 부근의 냇가에 산재해 있는 암석과 같은 석질의 것으로 꾸며졌고 크기도 매우 다양하여 인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삼국시대에 개발된 치석기법이 고려 중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주위 경관과의 조화를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송광사는 전남 순천에 위치한 절입니다. 전통사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경관을 띄고 있습니다. 사찰의 주변을 흐르는 계류를 인공적으로 막아 연못과 같은 기능을 부여한 계담이 있습니다. 계담에는 우화각이라는 사상누각을 설치하였고 영지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정원은 궁궐에서는 주로 모방 위주의 화려한 정원이 꾸며졌고 민간에서는 자연스러움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정원축조기법이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3. 민가정원
고려 후기 정원의 역사는 원나라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궁궐 정원은 팔각전을 세우고 주위에 화초를 심은 ‘화원’ 하나가 축조되었을 뿐이지만 민간정원은 왕성한 시기였습니다.
고려 중기 말엽에 새로운 관료층인 사대부는 주로 지방의 향리 출신으로서 자기의 향리에 작은 규모의 농장을 가진 중소지주이거나 자영농민이었습니다.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대체로 청렴결백한 인품을 가지고 있어 뜻에 맞지 않은 일이 생기면 깨끗이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로 되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자연을 벗 삼는 생활을 즐깁니다. 이런 생활태도를 소위 초야에 묻혀 산다고 하며 노장사상이라는 생활철학이 깊게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또한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연못의 형태는 곡지 형태였습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사륜정기를 보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정자에 네 바퀴를 달아 경치 좋고 서늘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이동식 정자를 설계한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캠핑카와 성격이 비슷하나 그 품격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고려시대 귀족들의 생활이 화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 귀족들은 요산요수하는 생활을 즐기기 위한 장소로 정원이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고려 후기에는 많은 ‘향거정원’과 ‘별야정원’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정원은 산속의 경치 좋은 곳에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생활을 즐기기 위한 시설을 최소한으로 꾸미는 것이 특징입니다. 고려 후기 정원은 정자문화의 전성기이자 고유수법대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PART 3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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