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년)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의 황제입니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공포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황제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중국을 통치한 200여 명의 황제들 중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습니다. 그래서 당나라 멸망 이후 문치주의와 유교 시스템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던 송나라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여성의 중앙정치 진출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고대에 그녀가 어떻게 황제가 되려 했는가에 대한 비판과 그녀의 욕심, 야욕, 욕망에 대한 것이 명나라까지의 주된 평가였다면 청나라 말 개항 이후 신해혁명을 거치며 평가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측천무후의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은 무미랑(武媚嫏)이며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曌)로 개명하였습니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였습니다. 624년에 태어나 705년 죽음을 맞이 할 때까지 그의 통치는 당 태종에서 당 현종 시기로 이어지는 당나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발전 및 계승해 현종 시기의 당나라가 태종 이후 또다시 전성기를 맞는 디딤돌 역할을 했습니다. 태어난 연도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1. 무측천의 성장기
무조는 624년 당의 이주(利州, 지금의 쓰촨성 광우안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유명한 목재상인데 수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617년 양광의 폭정 때문에 일어난 대반란에 당시 태원 유수 이연과 같이 참전하여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으로부터 태원군공 겸 이주 도독이란 작위를 받았습니다. 620년에 부사확이 본처를 잃고, 양 씨를 새로이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으니 그중 둘째가 무조입니다. 무조의 어머니 양 씨는 수나라 시절 재상을 지낸 양달의 딸로 명문 출신이었습니다.
2. 무측천의 후궁시절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 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4세의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렀습니다. 부사확이 죽은 뒤로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무조는 입궁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무조는 가문이 빈한하여 황제의 후궁 중 비교적 낮은 지위의 재인(才人, 정 5품)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태종 이세민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단 세 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라고 고했습니다. 이세민은 무조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649년 이세민이 사망하고 9남인 이치(李治)가 동복형 이태를 제치고 황제 고종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穿照)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갔습니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 반하였다고 합니다.
이치는 650년 여름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몰래 [여의낭] (如意娘)이라는 시를 지어 보였습니다. 무조는 그 길로 고종을 따라 입궁했습니다.
3. 무측천의 재입궁과 암투
무조의 650년 입궁에는 이치의 황후인 왕 씨의 도움이 컸습니다. 왕 씨는 당시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 숙비(蕭淑妃)를 질시했는데 이치와 무조의 감정을 알고 이치를 소 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왕 씨는 무조에게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고 이치에게 무조를 후궁으로 삼으라고 부추겼습니다 무조는 왕 씨의 비위를 맞추며 지극히 공손했고 왕 씨는 무조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복종한다고 여겨 이치 앞에서 여러 번 무조를 칭찬했습니다. 이치가 무조를 왕 황후와 소 숙비 다음가는 지위인 소의에 봉하려 하자 왕 씨는 흔쾌히 승낙했다고 합니다.
무조는 652년 이치의 장남 이홍(李弘)을 출산했으며 왕 씨와 결탁하여 소 숙비를 폐출시켰습니다. 이렇게 무조는 비(妃)가 되었지만 궁내에서 왕 씨와 일족의 오만한 태도에 대한 나쁜 평판을 기회 삼아 그들을 반대하는 궁인들을 모았고 왕 씨의 행동을 파악하였습니다.
무조가 654년 첫딸 안정공주를 낳자 황후 왕 씨는 무조의 처소를 찾아 영아를 보고 갔습니다.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교살하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습니다. 이치는 왕 씨를 폐서인하고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때가 영휘 6년이었습니다. 황후가 된 무조는 왕 씨와 소 숙비에게 곤장 백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였다고 합니다. 또한 왕 활 후와 소 숙비의 성을 각각 망(蟒, 이무기), 효(梟, 올빼미)로 바꾸어 불렀다고 합니다.
4. 비정한 어머니 무측천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남편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또한 장손 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렸습니다. 656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 씌우고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습니다.
이런 그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는 페황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 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을 모두 처형해버렸습니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 보내졌다가 664년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치에게 ‘건언 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습니다. 얼마 뒤 이치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치는 황 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이치와 대소 신료들 사이에서도 신임이 두터웠지만 무씨의 뜻을 기운전에서 고종, 이홍과 함께 식사를 하였고 이홍은 그 자리에서 독살당하였습니다.
이후 그다음 아들인 이현이 황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여 이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아들의 총명에 위기감을 느껴 이현을 여색을 밝힌다고 모함하여 황태자에서 폐출했지만 이치의 요청으로 죽음만은 면하였으나 681년 수도에서 2300리 떨어진 파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현은 유배지에서 [황대과사]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가 퍼져 무씨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무씨가 조사한다는 구실로 구신적을 파주로 보내 아들을 자살하게 하였고 조정에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구신적이 이현을 죽였다고 덮어씌웠습니다.
5. 황제로 향하는 무측천의 발걸음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습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바로 중종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습니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 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그가 바로 예종입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습니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684년 양주의 서경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습니다.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어쨌든 그녀는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그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씨는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습니다.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조카 무승사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는 쓰인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습니다.
한편, 당 고조 이연의 11남인 한 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으나 무씨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자기의 황제 즉위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말았습니다.
6. 여제 무측천
그녀는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친 후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습니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 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혹리를 동원해 그녀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을 양성한 후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시켰으며 이를 통한 혹리들의 정치참여를 꺼려 그들을 죽이는 ‘토사구팽’을 취하였습니다.
비록 잔혹하게 황제의 지위에 올랐지만 정치가로서는 상당히 유능한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먼저 국법을 엄격히 해 주나라의 일원적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뤄나갔습니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또한 과거를 회시, 공시,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요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당나라 때도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습니다. 이들이 ‘적인걸’ ‘장간지’등입니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습니다. 그녀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 사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재위하는 동안 당나라 장안성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국제도시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동서양을 통틀어 그 시대 현존하는 가장 최고의 국제도시이자 동서양이 만나는 장이 바로 장안임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는 당 현종 시기 조로아스터교 경교 등이 전래될 정도로 가장 뛰어난 세계 최고의 도시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진실의 함’을 만들기도 했으며 50여 년 동안 당나라에서의 민란과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민생회복과 생산력 강화를 국정운영의 기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2년 3 모작이 가능해졌습니다. 자영농이 성장했으나 도리어 전쟁이 더 이상 발발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영토가 확보되지 않자 자영농이 조금씩 쇠퇴하고 지주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식 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습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습니다.
7. 무측천의 말년과 죽음
말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무씨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열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습니다. 6년 뒤인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 만에 복권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습니다.
무씨는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 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 달라 간청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습니다. 705년 거의 반 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 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그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 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무씨는 본래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대신하여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그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8. 평가
개원 4년 측천무후의 아들이었던 태상황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은 무측천의 시호에서 [황제]를 제회하고 무측천의 정책을 부정했으며 그녀나 무씨 일족에 의해 숙청된 자들의 명예회복을 실시하였습니다.
후세 중국 사회나 문인 사회에서 측천무후는 여성으로서 군주의 권한 위에 군림하면서 당의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부정적 평가가 이어졌고 찬탈에 실패한 위황후의 행실과 함께 '무위(武韋)의 화(禍)'라 부르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치세 중의 사적에 대해서도 그녀가 정치를 펼쳤던 시대에 떠돌거나 도망친 호수가 늘어나는 등 전적 파악이 등한시되고 은전이 늘어나 균전제를 실시하기 곤란해졌으며 측천무후 자신의 씨족을 요직에 앉혀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서도 혹평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녀가 권력을 쥐었던 기시에 중국에서 농민반란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관 말기의 호수가 줄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활은 그전보다 안정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나아가 그녀의 인재 등용 능력은 측천무후를 혹평했던 후세의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것으로 측천무후에 의해 등용되었던 인재들이 현종 시대 개원의 치를 이끌었다는 점도 주목할만합니다.
또한 전근대의 사학자들 가운데서도 [밝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평했던 남송의 홍매나 [여자 중의 영명한 군주]라 부르며 현상 유지나 구습 타파에 대해 호평한 청나라의 조익처럼 무측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도 존재합니다.
문화 대혁명을 지휘했던 장칭에 이르러서는 남편 마오쩌둥 주석의 사후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명실공히 중국의 국정을 쥐었던 측천무후를 자신에게 겹쳐서 이를 칭찬하는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장칭가 문혁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부정되었으나 무측천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속 텔레비전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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