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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바빌론의 바벨탑과 공중정원(The hanging garden of Babylon)

by 해피샤론 202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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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기능사 공부를 하면서 고대의 유명한 정원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바빌론과 바빌론의 공중정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문헌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바빌론이라는 나라와 부강함을 상징하게 된 바벨탑과 공중정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은 얼마나 높았을까? 공중정원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얼마나 멋있으면 공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개요)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지배하던 신 바빌로니아가 강대해지고 우장한 신전과 궁전 등이 지어졌습니다. 바벨탑과 공중 정원 등이 생겨 수도 바빌론이 구 바빌로니아 시대보다 번영했습니다. 이후 오리엔트가 통일되어 오리엔트 전체가 하나의 국가 및 문화권으로 묶여 역사적 세계로서의 오리엔트가 성립되었습니다.

 

1. 아시리아, 오리엔트 세계를 정복하다.

혼란하던 오리엔트 세계는 메소포타미아의 일대 세력이었던 아시리아에 의해 비로소 통일되었습니다. 아시리아 인은 셈족의 일파로서 원래 통상 민족었으나, 기마와 전차를 보유한 군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 말에는 오리엔트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 제국이라 일컬을 만한 국가를 건설하였습니다. 수도 니네베는 그 웅장함과 번영을 자랑하였습니다.

2. 바벨 탑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지어진 불가사의 건축물 바벨은 아타드어로 신들의 문이라는 뜻은 밥-일리(Bab-ili)에서 유래했습니다.

 

바벨 탑 구약성서 창세기 제11장에 등장하는 건축물로서 인간들이 천국에 닿으려고 계속 쌓았는데 그 오만함에 분노한 야훼가 모든 인간의 말을 제각각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연대순으로 한다면 대홍수 후 101년에 일어난 일로 추정합니다. 추정의 근거는 에벨의 아들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직 노아가 살아 있는 동안 발생한 사건으로 노아는 이후에도 249년을 더 살고 950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창세기 기사에 니므롯의 영역이 시날 땅 바벨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니므롯이 바발탑을 세웠다고 추정합니다.

 

창세기에는 이로 인해 탑에는 혼돈을 의미하는 바벨(Babe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의적인 의미로서 혼돈을 의미하기도 하나 바벨론 즉 바빌로니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대충적으로 알려져 있는 성경 속 바벨탑의 이미지의 실제 모델은 마르두크의 지구라트입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건설한 왕으로 유명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명령으로 신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지어 진 건축물입니다. 높이와 넓이가 무려 90m를 넘는, 현재로서도 거대하고 당시에는 상상조차 못할 거대한 건축물이었고, 지구라트의 건설 목적도 조금이라도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왕이나 신관들이 보다 신과 가까워지는 것이었습니다.

 

탑의 꼭대기에는 제단이 있는 신전이 있는데 이슈타르의 문과 같은 푸른 벽돌로 장식되어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해집니다.

 

마르두크 지구라트, 즉 바벨탑은 신 바빌로니아의 초대 왕이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사르가 처음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바벨탑은 처음부터 지금 크기로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발굴 결과에 따르면 나보폴라사르는 처음에 65Í65m인 탑을 건설했지만 건설 도중 무너졌고 이후 85Í85m 크기로 탑을 새로이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자 95Í95m 규모의 탑을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나보폴라사르는 바벨탑이 15m가 올라갔을 때 사망했고 그의 뜻을 이어받은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남은 부분을 모두 완공하고 꼭대기에 신전을 건설하면서 마르두크 지구라트를 완성했습니다.

가로와 세로 30cm, 높이 8cm의 구운 흙별돌 최대 7,500만 개를 사용했다고 추정하는데 하중을 줄이고 접착력을 올리기 위해 벽돌 사이에 몰타르를 깔고 갈대와 밀짚을 올렸습니다. 또한 석회를 별돌 외부에 발라 흙별돌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역청을 발라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았습니다. 특히 꼭대기에 위치한 신전은 당대 최고의 보석인 라피스 라줄리로 둘렀고, 바벨탑 곳곳에 푸른 자기 벽돌을 활용해 울트라마린을 입혔습니다.

 

초고층빌딩을 만들면 경제가 불황을 친다는 이론으로 마천루의 저주 혹은 현대판 바벨탑의 저주라고 합니다. 10층 이상의 초고층 빌딩은 임차인을 채우는 데만 5-10년이 걸릴 정도로 엄청난 공급물량을 자랑합니다 보통 부동산 활성기 때 빌딩이 건설되는 걸 감안하면 빌딩이 완성될 때 쯤엔 이미 부동산 거품이 한계에 이르거나 거품이 꺼져가는 시점이 됩니다. 그런데 빌딩이 완공되고 그 빌딩에 포함 된 수많은 공실 물량이 한 순간에 부동산 시장에 풀려 버리면 대량의 공급 과잉이 발생하게 되고 그로 인한 수요 부족으로 시장 균형 가격의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공중정원에 대하여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문명뿐만 아니라 오리엔트 세계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바빌로니아 왕국, 아시리아, 신 바빌로니아 왕국, 페르시아 제국, 마케토인아 왕국(알렉산드로스 대왕) 등 여러 고대 국가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바빌론은 멸망하지 않고 그대로 생명력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바빌론을 지배했던 역대 왕들은 도시의 규모를 서서히 키워나가면서 수많은 건축물들을 건설했습니다.

 

그런 건축물 중에서 전설적인 바벨탑을 비롯해 신전과 성역, 성벽이 존재했으며, 현재 재건되어 형체가 남아 있는 이슈타르의 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에는 그런 모든 건축물들을 압도할 만한 뛰어난 건축물이 존재했습니다 그 건축물은 중세 유럽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떠 있는 정원이 있다는 전설이 생겨날 만큼 유명했던 바빌론의 공중정원입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신 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게의 재위기간 (B.C.605-B.C.562) 중에 건설되었습니다.

 

공중정원이라는 명칭은 계단식 발코니 위에 식물을 심어놓은 모습이 마치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공중정원의 각 테라스에는 엄청난 양의 흙을 쏟아 부어 만든 정원이 있었고 여기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물들을 관리하기 위해 도시를 관통하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왔습니다. 아마도 역대 왕들은 바빌로니아 대지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공중정원 안으로 들어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당시 바빌론에는 지구라트나 이슈타르의 문 같은 미관이나 규모 면에서 공중정원 못지 않은 우수한 건축물들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실물들이 뿜어내는 푸른색을 보기 힘든 바빌론에서 인공적인 정원을 만들어낸 뛰어난 기술력이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꼽히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공중정원을 만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신 바빌로니아 왕국을 강력한 국가로 만든 왕이었습니다. 그는 외국과의 교역을 적극 장려했는데 주로 대추야자와 밀, 양모 등을 주변 국가로 수출해서 왕국을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도량형을 통일하고 왕국 내의 교역 활동을 촉진시켰으며, 은행제도와 금융업을 발전시켰습니다.

 

당시 중동에서는 대부를 통한 이자로 돈을 버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빌론에서는 적극 장려되었습니다. 따라서 바빌론에서는 금융업이 발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지역에서는 일부러 바빌론까지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은행가들 중에는 이자로 큰 돈을 벌어 왕족처럼 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번영으로 얻은 부를 바빌론 재건에 투입해서 도시를 확장했습니다 그와 그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사르는 구 바빌로니아 왕국, 즉 바빌론 제1왕조 시대의 바빌론을 재현하려는 의도 하에 계속해서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들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대외적으로 악명 높은 바빌론 유수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B.C.597, B.C.586, B.C.582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유대왕국을 침공해 귀족과 군인 등 약 45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바빌론으로 압송해왔습니다. B.C.538년 신 바빌로니아 왕국이 멸망한 후 포로가 되었던 유대인들은 해방되었지만 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바빌론 유수 사건은 후에 성서에도 기록되어 바빌론의 나쁜 이미지가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공중정원은 메디아 왕국에서 바빌론으로 시집온 사랑하는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바빌로니아와 연합해서 아시리아를 멸망시켰던 메디아는 바빌로니아의 동맹국으로, 두 나라는 서로를 신뢰한다는 증표로 왕족끼리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메디아 왕국은 산가 나무가 많아 자연 환경이 좋은 나라였지만 바빌론은 평탄한데다 비도 잘 오지 않는 자연의 혜택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고향의 산과 푸른 나무를 그리워하는 아미티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공중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빌론에서 출토된 점토판에는 공중정원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공중정원에 대한 기록이 있는 점토판에는 정원에 심어져 있던 식물의 리스트 정도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리스트에 올라 있는 거의 대부분의 식물이 식용이나 약용이어서 일부 학자들은 공중정원이 식물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빌론에서 출토된 점토판이 아직까지 모두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용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공중정원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아직까지 전승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처음 바빌론을 발굴할 때는 왕궁 남쪽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수타르의 문 바로 옆에서 발견된 14개의 작은 지하실이 정원을 떠받치고 있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지하실 위에 테라스가 건설되어 정원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바로 이곳이야말로 공중정원이 있었던 곳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 장소가 물을 끌어오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콜데바이는 스스로 조사를 해보지 않으면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고 한 발 물러섰습니다.

실제로 공중정원은 남쪽 왕궁 부근에 있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곳에서 기름 분배에 간한 내용이 쓰여진 점토판이 발견됨으로써 기름 보관 창고였던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아치형 천장은 도로를 지탱하기 위한 보강 기둥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소재가 불분명한 이상 공중정원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대 저술가들의 기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로 7대 불가사의 을 선정한 비잔틴의 필론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중정원은 석재 기둥으로 떠받쳐져 있으며, 정원 밑 공간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들보는 모두 종려나무를 사용했는데 대들보 사이를 상당히 촘촘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부러 종려나무를 사용한 이유는 쉽게 썩지 않는 목재인데다 물이 스며들어 압력을 받으면 활처럼 휘고 간격도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간격 사이로 식물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고 물도 흘러내려가는 것입니다.

 

대들보 위에는 대량의 흙을 쏟아 부어 여러 식물들을 심었는데 사람들이 걸어 다녀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튼튼해서 보통 지면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원에 심어놓은 식물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에서 수도관을 통해 물을 끌어왔습니다. 정원 위로 물을 운반하는 데는 바퀴가 달린 대형 수차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퍼 올린 물은 각층에 설치되어 있는 수로를 타고 운반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필론의 기록이 실제로 얼마만큼 정확한지는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확인해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필론의 기록을 통해 대략의 모습을 추정해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원래 필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는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들어 있는 반면 알레산드리아의 대등대는 빠져 있습니다. 당시 필론은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처럼 대등대를 볼 수 있어서 7대 불가사의에 넣지 않았던 것입니다.

 

필론에 따르면 바빌론의 성벽은 둘레가 66킬로미터에다 높이는 24미터가 넘었으며 여러 개의 감시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벽 꼭대기는 4두 전차 네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 따르면 바빌론의 성벽은 다음과 같이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우선 도시 둘레에 해자를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벽돌로 성벽을 쌓으면서 벽돌 사이에 천연 아스팔트(천연 아스팔트는 오래 전부터 방수 처리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남아 있는 대표적인 유적은 B.C.3000년경에 건설된 모헨조다로)를 칠해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해자를 둘러싼 벽을 쌓은 것과 같은 공정으로 성벽을 건설했습니다.

 

실제로 발굴된 성벽의 둘레 22킬로미터, 벽의 두께는 30미터였습니다. 그리고 발굴될 당시 성벽이 무너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었습니다. 2중 구조의 외벽 바깥 쪽에는 불에 구운 벽돌을 안쪽에는 다소 질이 떨어지는 햇빛에 말린 벽돌을 사용했는데 두 벽 사이에는 자갈을 채워 넣었습니다.

 

필론은 아시리아의 여왕 세미라미스가 바빌론의 성벽을 건설했다고 밝혔지만 세미라미스 여왕은 B.C.809년부터 B.C.806년까지 불과 4년간 섭정을 했기 때문에 성벽의 건설을 명령할 만큼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학자들은 실제로 건설을 명령했던 인물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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